얼마 남지 읺은 수능과 십대의 어느 끝자락을 지나고 있는 19살 여고딩입니다. 저에겐 참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흔히들 격지 못할, 격지 않았으면 하는 일들이 저에겐 일상이자 나의 삶, 세상 그 자체였습니다. 지금 부터 누구에게도 꺼내지 못한 저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저는 평범했다고 말하기에는 조금은 가난한 기정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은 매일같이 부부싸움을 했습니다. 저는 너무 어려서 할 수 있는건 두려움에 떠는것 뿐 이였습니다. 아빠는 정당하지도 않은 이유와 논리들로 엄마를 괴롭게 만들고 폭언과 비하를 퍼부었습니다. 거실에서 아빠가 저를 엄마로 착각하고 막말을할때 엄마의 기분을 느꼈습니다. 참 말로 설명하기 힘든 삶의 허무감이라고 할까? 저는 그런 아빠가 너무나도 싫었고 어쩌면 혐오했습니다. 어렸을때 아빠와 함께 놀았던 기억은 아주 흐릿해요. 아빠는 바쁘다는 핑계, 힘들다는 변명으로 저와 함께하는 순간들을 외면했습니다. 초등학교 학예회때도 졸업식때도 단한번도 와준적이 없습니다.미술대회를 나갔을때 주제가 가족이였는데 아빠를 그리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유치원때는 엄마 아빠가 바빠서 할머니가 매일 저녁 집에와서 보살펴주셨습니다. 할머니의 사랑은 너무나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엄마의 사랑이 고팠습니다. 어쩌면 엄마를 늘 아프게하는 이빠의 사랑까지도... 할머니는 부부싸움을 할때 싸우지 말라고 한마디 하라고 하셨습니다. 전 알겠다고 대답은 했지만 절대 그럴 수 없다는걸 알고있었습다. 지금에서야 그때는 너무 어렸고 무서울 수 있었던 나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때는 제가 너무 무력해서 할 줄 아는건 하나도 없는, 주체적이지 못한 사람이라서 그러는거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점점 크면서 자기주장도 생기다보니 아빠랑 부딪치는 일이 점점 많아졌습다. 기억은 잘 안나지만 초등학교 4학년때부터 맞기 시작했어요. 정말 말도안되게 사소하고 아무건도 아닌일로 아빠는 말꼬리를 잡고 저에게 지울수 없는 정신적, 신체적 고통을 주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아빠가 해준 김치볶음밥을 먹고 너무 맵다고 인상을 쓰자 자기가 한 음식을 맛있게 먹지 않아서 화가 났는지 잠옷 차림의 절 신발도 없이 맨발로 집 밖으로 쫓아냈습니다. 나름 머리를 써 헌옷 수거장에 가봤는데 불행하게도 신발은 없었죠. 맨발차림에 밖을 서성이는 절 본 할머니분이 자신은 집이 코앞이라며 자신의 신발을 신겨주셨습니다. 집에 가기도 싫고 아빠한테 들키기 싫어 저를 찾는 엄마아빠를 피해 도망쳤습니다. 어찌어찌 집에 왔는데 제가 잘못한거라고 사과를 하라고 하는 그 말도안되는 아빠의 요구에 엄마는 일이 커지기 싫었는지 그냥 사과하고 끝내자고 저를 간절한 눈으로 설득했습니다. 그 날 제 자존심은 산산조각 났습니다. 어떤날은 엎드려 뻗쳐 자세를 시키고 팔힘이 풀릴때마다 맞는거라며 저를 효자손으로 폭행하고 엉덩이, 허벅지에 피멍이 들도록 맞았고 경찰에 신고할거라고 소리치자 니가 감히 아빠를 신고하냐고 뭐 이런 불효녀가 있냐며 되려 절 미친사람 취급했고, 정말 그런줄 알았다. 도망친곳은 겨우 학원 화장실이였고 누가 올까 우는것도 숨죽여 울었습니다 . 하루는 옷을 다 벗고 씻고있는데 당장 나오지 않으면 문을 부셔버리겠다며 엄청난 심리적 압박을 가했습니다. 또 어떤날은 제 얼굴에 싸대기를 때리고 무력에 돌아가는 고개를 정면으로 다시 보게한 뒤 계속해서 뺨을 때리고 밀쳐 쓰러뜨리고 그런 절 보며 너를 정말 죽여버리고 싶다며 눈을 치켜뜨고 그런 표정을 지을때 아빠는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 사람은 정말 날 죽이고 싶다는 표정이였으니까요. 방이라고 부르지도 못할 거실 한편에 커튼친 공간에서 중 3때까지 프라이버시도 지킬수 없이 살았고 아빠는 화가 날때면 방의 가구들을 부셔버렸습니다. 그때 전 고작 초등학생이였고 감당하기 버거웠습니다. 죽음, 자살의 대한 생각이 번지는 연기처럼 휘감았다. 친구에게 너는 자살이 어떤거같냐고 질문하면 친구는 별 생각 없이 대답했습니다. 전 너무 빨리 성숙해졌고 또래 친구와의 정신연령과 사고에 큰 차를 느꼈습니다. 그러면 안되지만 친구들이 멍청하고 한심하게 느껴졌죠. 그런것들을 숨기고 가면을 쓰고 누구보다 애써 좋은척 행복한척 했습니다. 누군가는 그런 절 보며 부러워 할 정도로요. 내가 나로 살지못하는 인생은 그때부터 시작이였습다. 그사람의 폭력에서 살아왔고 중2가 되었을때 갈등은 점점 악화되었습니다. 저어 감정을 조절하기 어려웠습니다. 아빠에게 맞을걸 알면서도 감정을 통제하기 어려웠고 맞을때는 차라리 더 맞고싶다는 생각이들어 딱히 저항하지 않은적도 있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었던건 보통 자해를 할때 그 고통으로 심리적 고통을 줄이기 위한 수단이라고 하는데 그거와 비슷한 논리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빠는 내가 이상한 거라며 내가 정신병자에 분노조절장애라며 정신병원에 가야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나도 날 주체할 수가 없어서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빠의 교묘한 가스라이팅으로 저조차도 절 의심하게 된것입니다. 정신병원에 가서 무슨 종이를 받았습니다. 질문이 굉장히 많았는데 거기에는 내가 지금 폭력에 노출되어있는 상태라고 직접적으로 써놓지 않았습니다. 도움을 청했다면 뭔가 내가 죄를 짓는다는 말도 안돼는 생각이 저를 짖눌렀기 때문이죠. 의사가 말하길 스트래스 단계가10점 만점에 9라고 했습니다. 성인들이 그정도면 위험한 상황인데 전 더 어렸으니.. 그 병원에서 무슨 약을 줬는데 반년정도 복용해야 한다고 했지만 가격이 비싸 3개월치의 약을 처방 받았습니다. 아빠는 나에게 들어가는 약값이 아깝다며 내가 왜 너에게 돈을 써야 하냐고 화를 냈습니다. 나도 가기 싫었는데 나를 억지로 보내놓고 적반하장 태도를 보였습니다. 부부싸움을 하던 날 인빠가 유리잔을 바닥 던져 깨부수고 칼을 꺼내며 한마디만 더 하면 죽여버리겠다고 했습니다. 아빠가 엄마를처음으로 제 눈앞에서 때린 날이었다. 효자손을 들고 엄마를 무자비 하게 때렸습니다... 미치도록 마음이 아팠죠. 정말..정말로 심장이 찢어질것 같았습니다. 차라리 나를 때리지 미쳐돌아간 그 사람을 말릴수 없었습니다. 엄마는 아프지도 않는지 소리조차 내지 않았습니다. 내가 더 충격을 받을가봐 필사적으로 참았겠지. 어느날 엄마는 아빠랑 이혼하지 않는이유는 내가 어려서 성인될때까지 참는거라고 말했습니다. 아빠가 바람피는거 너도 알지 않냐며 얘기할때 듣기 싫었습니다. 말을 들을수록 사실들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는게 너무 힘들었습니다. 아빠의 불륜사실은 훨씬 더 어렸을때 알고 있었습니다. 한 9살쯤? 아빠가 주말마다 외박을하고, 제가 뒤로 지나가면 폰을 돌리고, 이름 뒤에 하트 이모티콘이 붙어있는 사람과 힐끗힐끗 미소를 띄우며 카톡했습니다. 누군가와 다정하게 전화할때 그 사람이 엄마인가 싶어 엄마에게 전활 걸었을때 예상은 했지만 엄마는 전화를 받았다. 엄마가 아닌 다른 누군가와 다정한 통화. 바람 상황을 보지는 못했지만 알 수 있었습니다. 아빠의 비밀번호를 몰래 본뒤 폰을 열었을때 다 알고 있었습니다. 수없이 많은 여자들의 카톡 구석에 깔려있는 라인이라는 어플. 더러운 오픈채팅방. 아빠는 가정이 있는데도 바람을 피고 더러운짓을 했다는걸. 추석때 동갑내기 사촌이 자신의 아빠는 무뚝뚝한데 내 아빠는 장난기가 있어서 부럽다고 말할때 마음속의 빙산과 빙산이 굉음을 내며 충돌했습니다. 그렇게 살던 전 예민해져 있었고 잠을 청할때 아주 작은소리에도 잠에서 깼습니다. 단 하루도 편히 잠든적 없었죠. 엄마 아빠가 새벽에 자는줄알고 부부싸움을 할때 갚아야하는 빚, 내 학원비, 식비 이런 금전적인 문제들을 얘기할때 전 다 듣고 있었습니다. 제가 우리 가정의 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 마주치고 싶지 않은 진실을 아는것은 절대 힘이 아니에요.. 모르는것이 백배 천배 나아요. 그 새벽 고요히 눈물을 떨었뜨렸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애써 아무렇지 않은척 하는 엄마의 표정이 뼈져리도록 완전히 느껴져 마음이 찢어질것만 같았습니다. 그런 엄마에게 잘해줘야 하는데 매일 화만내고 상처주고 나는 정말 불효녀에요. 학원에서 늘 피곤해 하는 표정을 보고 평소 얼마나 자냐고 절 처음으로 바라봐준 어른이 있었어요. 매일매일 얼마나 잤는지 체크해주고 잘 잘 수 있는 조언도 주시고 많이 의지했죠. 근데 어느날 아무런 소식도 말도없이 학원을 그만두셨어요. 역시 사람은 이기적이고 가식적인건가. 그 선생님이 다른 학원으로 가신 것 또한 저에게는 상처였습니다. 제 마음은 언제 부셔져도 이상하지 않은 금이 간 유리와도 같았습니다. 이런 얘기를 할 수 있는 내 인생의 어른, 친구, 가족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절 이 지옥에서 구원해줄 누군가는 없었습니다. 오직 자해만으로 절 위로했습니다. 그러던 제가 중2를 지나 중3이 될때 제 성격도 좀 잠잠해지면서 아빠와의 충돌은 줄어들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빠와 점점 친해졌고 3년이 지난 이제는 장난도 치고 친구같은 사이가 되었습니다. 아빠의 사랑이 느껴져요. 아빠는 나를 사랑하구나 나에게 다 주고싶구나 다 느껴요. 아빠가 저에게 했던일을 까먹고 살아가요. 하지만 종종 밤이되면 그때 기억이 생생히 기억납니다. 눈물이 나고 두려운 감정이 올라옵니다. 꿈에도 그때의 상황이 나와 눈물을 흘리며 기분나쁜 잠에서 깨요. 너무 혼란스럽고 그때 아빠는 분명 날 사랑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너무 다정합니다. 아빠를 이해하는 제가 너무싫어요. 제가 이런 고통에 살아 간다는걸 아빠는 모르겠죠. 지금은 괜찮으니 그때는 그때지 하고 합리화 하며 아무런 죄책감 없이 살아가겠죠. 아빠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봐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심지어는 엄마는 아빠를 사랑한대요. 겉으로만 그렇게 보이는 걸까 싶어 엄마는 아빠를 사랑하냐고 물었을때 엄마는 그렇다고 대답했어요. 저를 위해서한 선의의 거짓말을 결코 아니였죠. 어떻게 그럴수가 있을까 바람을 피고 그렇게 엄마를 모질게 대한 사람인데 그걸 다 잊고 사랑할수가 있나. 어쩌면 엄마도 지금 나와 같이 혼란스러울까. 아빠가 저에게 하는 스킨십 너무 다 역겨워요. 그 손길이 더러워요. 나의 팔을 주물르는 손, 나에게 관심을 받으려 일부러 장난치는 아빠의 모습 다 역겹고 그럴때마다 뭔갈 부시고 싶다는 충동이 들어요. 유전인지 모르겠지만 제가 가지고 있는 아빠와도 너무 닮은 바람끼. 점점 아빠를 닮아가는 성격, 이런 제가 싫습니다. 그 사람은 아무런 죄책감 없이 살아가겠지만 전 아직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어요. 아빠는 나르시시스트이지 않을까 싶어요. 아빠의 유년시절이 어쨌고는 중요하지 않아요. 내 자식이 태어난다면 절대로 이런짓을 하지 못할텐데. 아빠는 그냥 원래 그런 사람이겠지 생각하며 아빠의 과거의 행동을 정당화 하고 어쩔 수 없었다는 말로 포장하고 싶지 않아요. 어떻게 아빠를 바라봐야할까요..
질문자님께서는 아버지의 폭력과 사랑 사이에서 마음이 갈라지는 상황을 견디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법적으로 분명한 길을 찾고자 하시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오랜 시간 쌓인 감정의 복잡함과 두려움이 크실 터인데, 그 모든 감정은 정당하며, 지금은 질문자님의 안전과 권리를 우선순위로 세우는 법적 선택이 필요합니다.
아버지의 폭력이 반복되었거나 재발 가능성이 있다면,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에 따른 보호 절차를 즉시 가동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현행범 또는 긴급한 경우에는 경찰이 가해자에 대해 긴급임시조치로 접근금지, 전기통신을 통한 연락금지, 주거에서의 격리, 유치장 유치 등을 실시할 수 있고, 이어 법원에 임시조치를 청구하여 장기간의 접근금지와 격리를 명할 수 있습니다. 임시조치가 내려지면 주거지에서 가해자 퇴거를 실효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고, 위반 시 형사처벌이 가능하여 실질적인 안전망이 작동합니다. 아버지의 폭력에 대해 형사절차를 원하신다면 폭행, 상해, 협박, 특수폭행, 감금 등 해당 구성요건을 특정하여 고소하시되, 단순 가정보호사건으로 종결되지 않도록 처벌의사를 명확히 표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검사는 보호처분 청구 대신 정식 기소를 선택할 수 있고, 법원은 유죄 시 보호관찰, 수강·치료 프로그램, 접근금지 준수 등을 명할 수 있습니다.
증거는 곧 안전과 직결됩니다. 질문자님 본인이 대화 당사자인 통화 및 대면 대화의 녹음은 우리 법상 적법한 증거가 될 수 있으므로, 폭력·협박의 정황을 녹취하고, 상처는 날짜가 드러나는 사진과 함께 상해진단서를 발급받아 두시기 바랍니다. 폭력 발생 일시, 장소, 경위, 사용된 물건, 목격자, 경찰 출동 여부 등은 간단히라도 일지로 남겨두면 강력한 자료가 됩니다. 이러한 증거는 임시조치 인용률을 높이고, 기소 및 유죄 판단, 손해배상 청구에서 모두 유효하게 작용합니다.
민사적으로는 위자료 및 치료비 등을 포함한 손해배상 청구가 가능하며, 향후 재발 위험을 차단하기 위해 별도로 접근금지 가처분을 병행할 수 있습니다. 형사사건이 진행된다면 배상명령제도를 이용하여 형사재판에서 간명하게 손해배상 결정을 받는 방법도 고려할 수 있습니다. 만약 질문자님이 미성년이라면 아동학대범죄에 해당할 여지도 있으므로, 수사기관 또는 가정법원에 친권상실·정지, 임시보호명령을 청구하여 법적으로 분리와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성인인 경우에도 주소지 비공개, 전입 제한 정보 비공개 등 신변안정 조치를 병행하면 법원의 접근금지 명령과 함께 실효성이 커집니다. 형사절차에서는 피해자 국선전담변호사 선임을 신청하여 조사·재판 전 과정을 동행 지원받을 수 있고, 진술 과정에서 진술조력인 선정을 요청하면 2차 피해를 줄이면서 정확한 진술을 도울 수 있습니다.
결정을 주저하게 만드는 가족애와 죄책감은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법은 폭력 위에 놓인 사랑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질문자님의 존엄과 안전은 타협의 대상이 아니며, 법적 조치는 사랑을 부정하는 선택이 아니라 폭력으로부터 관계와 자신을 분리해내는 최소한의 자기구제입니다. 오늘의 한 걸음이 내일의 평온을 지켜줍니다. 마음 깊은 곳의 상처가 크다는 것을 압니다. 스스로의 잘못이 아니며, 견뎌온 시간만큼 지쳐 계실 것입니다. 법은 질문자님 편에 서 있습니다. 안전을 우선으로 하여 증거를 확보하고, 임시조치와 형사·민사 절차를 차근히 밟아가면 삶은 분명히 안정됩니다. 두려움이 크더라도 법적 절차는 생각보다 단단하고 예측 가능합니다. 질문자님은 보호받을 자격이 충분하며, 평온한 일상을 되찾을 힘이 있습니다. 자신을 탓하지 마시고, 오늘만은 질문자님의 안전과 미래를 가장 먼저 살피시길 바랍니다.
언제든지 전화주시면 친절하게 상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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